본문 바로가기
시사

1차 오일쇼크 (1973)의 원인과 그 영향 -1

by 아비투스_ 2020. 12. 29.
728x90
반응형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던 1973~1974년의 1차 오일쇼크의 원인과 그로 인한 경제적 영향을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우선 1차 오일쇼크가 어떤 사태인지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죠? 1차 오일쇼크는 제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 전쟁)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4차니까 앞에 이미 세 차례 중동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것 쯤은 눈치채셨을 겁니다. 중동전쟁 스토리까지 올라가면 포스팅이 너무 길어지니 4차 중동전쟁에 한정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세력인 이집트와 요르단 그리고 시리아는 이스라엘에게 기습을 당하며 크게 패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시나이반도를 빼앗깁니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점령 지역 (사진: 나무위키)

 

 

이집트는 패배의 설욕을 위해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었죠.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사력을 세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을 통해 증명했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사망하고 뒤이어 전쟁을 일으키고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에 오릅니다.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사진: 위키피디아)

 

사다드 대통령은 아랍의 단결을 도모하였습니다. 시나이 반도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만 이미 3차 중동에서 승리하고 미국까지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서구 강대국에 아랍의 힘을 보여주고 기회가 되면 시나이 반도까지 되찾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집트는 석유를 무기화 해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위한 계책을 마련합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전쟁 전, 아랍의 맏형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가 파이잘 국왕을 만납니다.

 

 

그리고 끈질 긴 설득 끝에, 사우디가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을 반대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가 뭔데 미국이 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느냐? 라는 의문이 듭니다.

 

미국은 많은 화폐 발행으로 금본위제 포기를 선언합니다. 이때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거래를 달러로만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금 대신 미국 화폐가치를 담보한 것은 다름 아닌 석유입니다. 물론 달러의 가치가 오롯이 석유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가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석유거래의 달러화 사용이 달러가치를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달러를 살린 오일

 

사우디 왕가는 당시 자신들의 안전과 부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이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이후 오일 거래는 달러를 기본으로 하게 되었고 달러는 사실상 '석유 본위제'가 된 것이죠.

 

이렇게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 달러의 패권에 큰 조력자였기에 미국과 공생관계였습니다. 때문에 사우디가 반대하면 미국도 쉽게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

 

 

미국을 단도리 할 준비까지 마치자, 이집트는 여러 차례 시나이반도 국경 부분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군사훈련이라는 것이 본디 실제로 포탄이 넘어오기 전까지는 훈련인지, 침공하는 과정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자극이 계속되면 무뎌지는 법이죠. 이집트는 여러차례 훈련을 실시하며 이집트가 실제로 이스라엘을 침공할 가능성은 적다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정보기관의 오판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1973년 10월 6일 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 침공을 기습적으로 시작합니다.

 

욤키푸르전쟁 전투도 (사진: 나무위키)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은 빠른 속도로 밀려납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기대 이상으로 이스라엘과의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습니다. 연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지도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집트의 목적은 애초에 이스라엘 점령이 아니었습니다. 적당한 승리를 통해 수에즈 운하를 되찾고 이스라엘과 서방국가들에게 아랍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면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될 우려가 있었죠.

 

미국은 이스라엘 핵무기 사용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핵무기 사용을 준비합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하며 더 큰 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우디가 반대하는 이스라엘 지원을 할 명분이 없었죠. 결국 소련이 이집트의 무기를 지원했다는 구차한 명분을 활용하여 이스라엘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막강한 미국의 화력지원으로 이스라엘은 반격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미 막심한 피해를 입은 후였죠.

 

 

 

미국은 정전 후 중재를 시도합니다. 이후 몇 년간의 협상 끝에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게 됩니다.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당하지 않았음에도 이스라엘이 이 영토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집트에 협상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스라엘의 인구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약 400만 정도였습니다. 이는 넓은 시나이 반도를 통치하기에는 부족한 규모였습니다.

 

 

 

이렇게 욤 키푸르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아랍의 산유국들은 수출을 줄여 석유 생산량은 줄어들고 가격은 폭등하게 되는 오일쇼크가 발생합니다. 이로 인한 영향은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하여 진행하겠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