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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1차 오일쇼크 (1973)의 원인과 그 영향 -2

by 아비투스_ 202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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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욤키푸르 전쟁 (제4차 중동전쟁)을 통한 이집트로 대표되는 아랍국가의 약진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욤키푸르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석유의 무기화'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출처:  https://topclass.chosun.com/board/view.asp?catecode=M&tnu=201109100022

 

 

 

석유의 무기화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급잉여의 소멸' 때문입니다.

 

수요공급잉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아래 서울의 택시수요공급 그래프를 보시겠습니다.

서울의 택시 수요공급 그래프

 

택시공급을 나타내는 노란곡선이 택시수요을 나타내는 파란곡선보다 위에 있는 시간은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초과공급 상황입니다.

 

승객 입장에서는 승객보다 택시의 수가 많기 때문에 택시가 잘 잡히겠죠. 택시기사분들은 이왕이면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향하는 승객을 태우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승객이 없는 상황에서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 보다는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객을 태우고 보는게 이득이겠죠.

 

 

그래프의 위치가 반대로 바뀌면 수요가 공급보다 많은 초과수요 상황입니다.

 

택시보다 승객의 수가 많기에 택시기사 입장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목적지를 가는 손님이 아니면 태우려하지 않겠죠.

 

승객입장에서는 카카오택시를 부르더라도 웃돈을 붙여서 호출을 해야 배차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한창 놀다가 모두 집으로 가려하는 밤 11 - 12시에 이태원이나 강남에서 택시를 잡아본 적이 있는 분은 매우 공감이 되실 겁니다 (새벽 3-4시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집니다).

 

위의 택시 수요공급 그래프에서 녹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왼쪽부터 각각 '수요잉여' '공급잉여' 입니다.

 

 

이태원의 택시 수요잉여 (출처: https://news.zum.com/articles/26737377?cm=popular )

 

 

 

1970년대 이전까지는 각국의 석유의 수요보다 생산되는 석유의 양이 더 많아 석유의 공급잉여가 존재했습니다.

 

석유의 구매자들이 가격을 결정하는데 우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됩니다.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원유 수요는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세계원유수요량 그래프

 

 

 

반면 세계 원유 공급량은 우상향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수요 증가에 비하면 그 속도가 더딥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석유가 남던 석유의 잉여가 소멸되면서 생산되는 석유의 양보다 석유를 원하는 국가가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석유 생산자들이 가격을 결정하는 '갑'이 된 것이죠.

 

세계원유생산량 그래프

 

 

당시 많은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에너지원을 기존의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욤키푸르 전쟁은 이렇듯 석유의 수요가 높아짐으로 인해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라는 무기를 통해 미국에 대한 레버리지가 생겼기에 가능했습니다.

 

미국이 욤키푸르 전쟁에 참전하면서 아랍국가들이 석유생산감축과 수출금지를 실행합니다. 1973년 무렵에 일시적으로 공급량이 줄어듬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당시 유가는 급격한 상승이 일어납니다.

배럴당 10달러 선이었든 유가가 배럴당 30달러선까지 상승합니다.

 

 

세계 유가의 변동

 

 

유가가 상승하면서 당시 석유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던 미국도 원유 수입을 위해 지출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달러를 계속 찍어내던 미국은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막고자 아랍 산유국의 큰형님인 사우디에게 원유결제를 달러화로만 하도록 딜을 칩니다 (1차 오일쇼크 이전 포스팅 참조).

 

달러화 결제가 이루어지면서 사우디는 석유 수출의 대가로 달러화를 받게 되고, 사우디는 이 달러화의 큰 비율을 다시 미국 국채 매입에 사용합니다.

 

 

이 방식으로 미국은 달러화의 가치를 보호할 수 있었고 미국과 사우디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유가가 상승하면서 아랍국가들은 떼돈을 벌게 됩니다. 이 때 우리가흔히 '오일머니'라고 부르는 석유로 인한 막대한 부가 중동 국가들에게 발생합니다.

 

 

한국인들에게 오일머니의 상징적 인물 만수르 형님. 지금보니 부자손금이시네요.

 

 

아래 표에서 사우디의 GDP 를 보시겠습니다. 1970년부터 1980년 사이 10년간 약 32배 이상의 엄청난 성장을 합니다.

 

이외에 다른 아랍 산유국들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룹니다. 그전까지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던 아랍국가들은 축적된 부를 인프라 건설과 정비에 투자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성장 (출처: 위키피디아)

 

 

이를 계기로 1970년대 '중동건설 붐'이 일어납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성장정책을 한창 추진하던 시기였고 건설 붐에 맞춰 건설근로자 파견으로 외화벌이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한 번 쯤 본 아래 사진이 이 무렵 사진입니다. 중동에서의 인프라 및 토목사업은 한국 건설사들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이때 벌어들인 외화로 국내에서도 경부고속도로, 산업단지, 아파트 개발 등 대규모 인프라/토목사업이 일어납니다.

 

토지개발과 경제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일반인들이 부동산 투자에 대거 뛰어들기 시작하고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일어납니다.

 

이 무렵 강남 개발도이루어지며, 지금의 '강남 불패 신화'의 초석이 되었죠.

 

70년대 강남개발을 다룬 영화 '강남 1970'

 

 

 

오일쇼크를 통한 1970년대 석유의 흐름과 미친 영향을 2회의 포스팅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지금의 세계 경제는 저 당시보다도 훨씬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만, 과거의 사례는 언제나 세상이 돌아가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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